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6.25 전쟁/미군 참전과 역할 (문단 편집) == 미 동원령 선포와 예비군 투입 == 문제는 미국의 ‘사활적 이익지대’인 서유럽과 그 다음 순위인 중동에 주둔한 미군 병력들을 건드리지 않고 극동과 본토 병력만으로는 이러한 어마어마한 대군이 나올 수가 없었다. 결국 미 의회는 트루먼 대통령에게 1951년 6월 30일 선별징집확대법안을 통과 시켜 예비군과 주방위군을 개별 또는 부대단위로 21개월 동안 현역 연방군으로 소집할 권한을 부여하였고, 7월 9일 이전 전역하는 병사들을 1년간 더 복무하도록 할 권한을 부여하였다. 또한 선별 징병제에 따라 5만 명의 장정들을 소집하여 보충해 나갔다. 또한 주방위군과 예비군을 소집하여 병력을 충원하였다. 한국전 발발 당시에는 미 육군 예비군 266,726명, [[주방위군]](National Guard) 324,761명, 소집예비군 184,015명, 비소집지원예비군(Inactive Volunteer Reserve) 324,602명, 비소집예비군 91,800명이 있었다. 원래 전쟁이 6월 25일에 일어난 이유가 북한이 8월 15일까지 남한을 점령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필요기간인 50일을 역산하여 나온 날짜이다. 8.15까지 통일은 물 건너갔으니 이때 북한군은 8.15까지 대구를 점령하겠다며 낙동강 전선에서 공세를 취하고 있었다. 당시 미군은 맥아더가 인천상륙 작전을 해야 한다며 배에 태웠다가, 낙동강이 무너지게 생겨서 배에 내려 긴급 땜빵하고 다시 배에 타기를 반복하고 있었던 시기가 바로 8월 14일이었다. 낙동강 전투가 한참이던 그 8월 14일, 육군 주방위군 27개 사단중 8개 사단과 20개 연대전투단중 3개 연대전투단을 포함하여 1,457개의 주방위군 부대가 동원되었다. 이들 부대로는 28·31·37·40·43·44·45·47 보병사단과 3개 연대전투단, 그리고 43개 대공포 대대로 총 138,600명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이중 40·45사단은 한국전선에 투입되어 1951년 중공군으로 인해 전선이 고착화된 이후 전선교대 부대가 되었다. 28·43사단은 유럽의 나토 방위를 위해 파견되었다. 주방위군과 마찬가지로 동원령에 따라 육군 예비군은 6,687개 부대중 934개 부대가 현역으로 소집되었고 이에 따라 장교 46,920명, 사병 150,807명 등 총 197,727명이 동원되었다. 전쟁 기간 중 초기 현역으로 전환된 43,000명의 예비역 장교를 포함하여 244,300명의 장병이 소집되어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단이나 연대 단위로 소집되어 현역으로 전환되어 투입된 주방위군과 달리 예비군은 원래 개인적으로 소집되어 현역부대를 보충하는 용도이다. 병력들을 소집하여 투입한 육군과 달리 미 해군은 퇴역한 군함 등 장비에 대한 보충에 중점을 두었다. 전쟁이 일어난 해 8월 28일에는 수많은 예비군과 함께 예비항공모함 프린스턴함(USS Princeton, CV-37)을 재취역하여 한국전에 투입하였고, 이어 1951년에는 순양함 본 홈 리차드, 에식스, 앤티텀함이 재취역하였으며, 약 22개 해군 예비 전투기편대가 제7함대기동군(Striking Force)에 현역으로 편입되어 한국 상공에서 전투 임무를 수행하였다. 미 공군의 경우 공군 주방위군 소속의 F-51전투기 145대를 소집하여 한국전선에 보낸다. 당시 한국전선에서 보여준 F-51 무스탕의 성능이 워낙 넘사벽이여서 미군의 최신예 전투기로 오인될 수 있으나, 당시 주방위군에서도 최신예 전천후 기종인 F-80 슈팅스타가 두 눈 시퍼렇게 뜨고 있었다. 사실 극동공군에서도 F-80을 요청했지만 어른들의 사정으로 주방위군은 F-51 무스탕을 보냈다. 또한 437 예비병력수송항공단, 452 예비항공폭격단, 403 예비병력수송한공단을 현역으로 소집하고 51년에는 주방위군의 116·136 전투폭격비행단을 현역으로 동원하여 극동군 사령부로 보내어 52년 7월까지 임무를 수행하였다. 전쟁기간중 공군 주방위군 22개 비행단과 공군예비군 10개 비행단, 그리고 10만 명의 공군예비군이 현역으로 소집되었다. 미 해병대의 경우 전쟁발발시 현역은 74,279명이었다. 팬들턴 캠프에 주둔하고 있던 제1해병사단은 제5해병연대만 보유하고 있었다. [[인천 상륙작전]]을 다룬 도서를 보면 미 해병 1사단이 이름만 존재하지 실병력이 없어 미전역+예비군을 소집해서 채워넣어 작전에 투입했다는 기술이 나온다. 대체 태평양 전쟁 때 날고 기던 수많은 미해병사단이 어디 갔냐 싶어 어안이 벙벙하지만, 알고 보면 다른 군종처럼 전후 예산 감축의 철퇴를 맞아 병력이 대폭 쪼그라들었던 것이다. 1950년 7월 그나마 남아있던 제5해병연대는 제1임시해병여단의 모체가 되어 한국으로 출발하였고, 전 세계에 있는 해병부대들은 1사단의 깃발 아래 모이기 위해 해체되었다. 또한 해병편성예비군 33,528명을 현역으로 소집하였고 해병지원예비군 90,944명 중 51,942명이 현역으로 복무하였다. 이들 예비역 중 장교 79%, 사병 77.5%가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용사들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